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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2016. 3. 12. 20:55[아키미라] 또다시 봄
또다시 봄
아키히토x미라이
#따뜻한_비가_잔잔하게_물결_위로_번지고_있었다로_끝나는_글쓰기
겨울의 해는 짧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상에 드리울 봄을 위해, 흙 위로 삐죽빼죽 고개를 내밀 작달만한 새싹을 위해 제 빛을 아껴두기라도 할 작정인가 싶다. 이제 막 떠올랐나 싶더니 금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태양은 늦은 하굣길에 오른 아키히토와 미라이의 발 뒤로 긴 그림자를 그려냈다. 나란한 발걸음, 그 끝을 시작으로 죽 이어지는 그림자가 이제는 낯설지 않다.
학교 앞의 건널목은 미라이의 이야기에 옅은 쉼표를 찍는다. 반대편 신호등에 닿았을 때가 되어서야 미라이는 다시금 말을 잇는다. 짚고 넘어갈 점이라면, 지금껏 이어져왔던 대화와는 전혀 다른 주제의 것이라는 것 정도였을까. 아마 졸업식에 쓸 꽃다발을 죽 늘어놓은 화단에 시선이 닿았음이라. 선배, 곧 졸업이네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낯은 속을 알 수 없다. 응. 그러네. 고개를 슬 끄덕이는 모습에서는 저도 퍽 반갑지만은 않은 소식이라는 생각이 묻어난다. 이후 침묵은 고개를 드민다.
나풀대는 갈빛 머리칼과 그보다 더 연한 노란빛의 머리칼, 언제부터인가 그 새에 눌러앉은 고요함 사이로 무언가 끼어든 것은 조금 후의 일이다. 흰 구름마저 선명한 주홍빛으로 물들여가던 하늘이 짐짓 흐려지나 싶더니 톡, 토독. 갑작스레 떨어지기 시작한 물방울은 회색 포장 도로에 진한 얼룩을 남긴다.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마냥 걷기만 하던 미라이가 먼저 그것을 알아채었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서는 아키히토 역시 알아챈다. 비를 피하려는 듯 제 머리 위에 두 손을 올린 미라이가 선배! 우산 있어요? 하며 다급하게 물어오지만 돌아오는 것은 당황스러움이 담긴 고갯짓 뿐이다. 그에, 선배, 저기로 가요! 하며 아키히토의 소맷깃을 꾹 쥔 채 도시락집 앞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전광석화와 같다. 교복을 입은 채 비를 맞으면 세탁비가 왕창 들고도 남는다는 철저한 계산 하에 나올 수 있었던 속도였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쏟아진다. 겨우내 푸석한 눈만 흩뿌린 것이 아쉬웠던 걸까 싶을 정도로 가야 할 때를 모른 채 한없이 내린다. 무방비 상태로 거센 빗줄기에 온몸을 맡긴 놀이터 모래밭은 움푹 패이기 시작한다. 빗줄기는 예외가 없다. 이제 막 뻗어난 벚나무 가지 또한 사정없이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마침내 한 가지가 꺾여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제야 아키히토는 앞을 향했던 시선을 거둔다.
그의 뇌리에는 문득 작년과 재작년의 봄이 스쳐 지나간다.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으나 2년 전에도, 1년 전에도 함께였으니, 아마 이번 해에도 저와 그녀는 함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리 생각하며 슬며시 웃던 아키히토의 뒤통수에 꽝 내려앉은 것은 조금 전의 아주 짧게 이어졌던 미라이와의 대화이다.
아, 졸업이구나 …
졸업한다 하더라도 만나지 못할 까닭은 없다. 히로오미도 졸업한 지는 오래지만 자주 학교에 놀러오고 있다. 가문의 일 때문에 얼굴 보는 시간이 확실히 적어졌다는 것은 있지만 … 뭐, 저는 그처럼 시간을 빼앗길 일도 없으니 더 자주 놀러 오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졸업한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은 어찌하여도 지워낼 수가 없다. 학교를 떠난다는 것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함께하던 등굣길과 하굣길, 그리고 문예부가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는다는 생각에서겠지. 그 서운함이 그대로 드러난 시선을 미라이에게 걸자, 그녀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아키히토와 눈을 맞춘다. 그럼 아키히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갤 돌려 다시 벚나무를 두 눈에 담는다.
… 우리, 올해도 벚꽃 보러 오자. 그리고 은근히 붉어진 볼로 덧붙인다. 그, 그땐 일부러 보러 온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아키히토를 바라보고 있던 미라이는 당황한 건지, 이, 이번 해에도 벚꽃은 예쁘겠죠, 선배? 하며 묻는 낯이 더듬는 목소리만큼이나 수줍다. 그녀는 곱게 휘어진 두 눈으로 저 먼 벚나무를 훑는다.
봄이라기엔 아직 불어오는 바람이 시리게만 느껴지는 3월 초, 봉오리도 채 맺지 못한 벚나무였지만, 아키히토와 미라이의 시선 속 풍경에서는 벚꽃은 이미 환히 만개하여 빛나고 있다. 세찬 비에도 굴하지 않는 벚꽃이. 그 아래 한껏 파인 웅덩이에는 작은 아이의 발이 쏙 담길 만치의 물이 고여 있다. 그 웅덩이에는 분홍빛 벚꽃이 언뜻 비치는 듯도 싶다. 따뜻한 비가 잔잔하게 물결 위로 번지고 있었다.
